K-ART를 위한 Kai Jun의 지난한 노력의 세월

K-ART를 위한 Kai Jun의 지난한 노력의 세월

Kai Jun

1. Kai Jun 미술의 시작과정

미술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은 자크 루이 다비드의 그림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느껴서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오랜 시간 동안 서양 미술사를 장식하던 수많은 예술가들을 흠모하고 따르며 그들의 테크닉을 연마했다. 이런 시간은 10대부터 몇 년 전인 40대 중반까지 이어졌었다. 수많은 작품을 제작했으며 연평균 45점 이상의 완성작품을 제작하였다. 1년이 52주이니까 거의 1주일에 1점 정도의 작품을 제작했다고 볼 수 있으며, 더군다나 나의 작품은 묘사가 많아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유형이지만 쉼 없이 계속하였다. 작품에 몰입한 시기의 대부분 서양미술을 이해하기위한 연구의 기간이었고, 따라서 서양인물을 주로 그렸다. 그 이유는 나에게 있어 빨리 많은 것을 깨우치는 것이 중요했는데 동양인을 대상으로 서양미술을 이해하며 그린다는 것이 벅찼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을 많이 그렸는데 이유는 중세시대에는 말할 것도 없고 서양미술사에서 남성은 가장 아름다운 존재이며 절대미의 완성체이지만 여성은 미완성체이며 남성에 비해 미천한 존재로 인식하였다. 남성의 누드는 존재해도 여성의 누드는 금기시 되었고 여성의 누드는 옷이나 동물로 가려야하는 무언가 부족한 존재로 인식했었다는 당시의 의식을 알고 나서부터였다. 나는 여성이 부족한 존재라고 보지 않았기에 여성의 아름다움을 통해 서양미술을 연구하겠다고 생각했었다.

아름다움을 찾기 위한 연구 과정이 계속되다가 2008년 뉴욕 전시를 통해 작품이 알려지며 해외 갤러리의 러브콜을 받았었다. 러브콜을 받으며 문득 떠오른 것이 나는 서양미술을 탐닉하고 좋아하며 누구나 서양미술과 동양 미술을 구분하고 있는데 한국인의 한국미술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이었다. 이런 질문을 스스로 하고 고민하면서 나의 존재와 정체성이 혼란스러웠다. 그때 마음을 먹었던 것이 나는 한국인이며 한국인이기 때문에 그릴 수 있는 한국의 미술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 이유로 이름도 한국의 예술가 정신(Korean, Artist, Idea)을 전면에 내세워 Kai Jun 으로 바꾸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는 한국의 미술을 스스로 정의하기에는 부족감이 있었고 우선 서양미술의 근본적인 것들을 이해하고 이념과 방식을 내 것으로 만드는 연구가 중심이던 시절이었다. 어릴 때부터 관심이 있었던 르네상스 시대부터 신고전주의까지의 작가들이 무엇을 고민했었는지를 알기위한 다양한 연구와 시도들이 있었던 시기였다. 마음으로는 항상 한국미술을 만들겠다는 의식을 고취시켰지만 한국인을 그리다보면 부족감이 있었다.

그런 지난한 시간들이 지나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에서 나타나는 위치에 따른 표정변화를 집중연구하고 재현하게 되었고 거의 모든 갈증이 해소됨을 느꼈다.

2. 모나리자의 신비를 알기까지의 여정

2-1.신비를 풀 수 있는 가능성의 타진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서양미술이 기술에서 예술로 인정을 받기 시작한 르네상스의 대표작이며 과학과 미술이 결합한 결과물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신비의 미소’라는 과학이나 합리를 뛰어넘는 신비함이 나타나는 작품이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평소 연구방식과 그의 다른 결과물들을 보면 분명 어떤 이론이 있었고 그 이론을 통한 결과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결코 우연을 기대하여 그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판단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알면 알수록 이론이나 방식이 존재할 것이라는 스스로의 확신을 가지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과 그의 연구 자료들을 탐닉하여 방법을 찾기 위한 연구를 계속하였다. 그는 이론이 있었지만 알리는 것을 지극히 꺼려하여 글씨의 방향을 바꾸어 남이 읽지 못하도록 한다거나 연구 기록물들이 어떤 상징적인 것들만 표기하고 나머지는 알 수 없도록 하였던 반면 영감을 얻어 무언가를 제작할 때 표준화하여 정리하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그의 무기와 관련된 발명품들의 경우 자기가 어떻게 하다보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작업노트와 설계도를 보고 충분히 만들 수 있는 표준 모델을 제시하며 제작할 수 있도록 하였던 이점이 나를 설레게 했다.

다빈치의 비밀스러움과 표준화를 지향하는 성향으로 인해 회화작품에서는 미완성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진품이라고 검증된 작품은 20여점 정도이며 대부분이 미완성된 느낌으로 끝나있다. 그중에서 모나리자는 주문 작품 임에도 불구하고 끝내 돌려주지 않다가 결국 말년에 프랑스로 가지고 갔다. 나는 이점을 주목하였다. 모나리자를 끝까지 다빈치가 가지고 다닌 것은 그가 제작 방법을 정리하기 위해 자료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상상했다. 나의 상상이 맞던 틀리던 나는 그런 가정 하에 그가 그림을 그리기위해 노력했던 여러 가지 해부학을 비롯한 과학적 접근과 기교에 초점을 맞추고 그의 방법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2-2. 신비를 찾기 위한 도전과 실패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스푸마토(Sfumato), 테네브리즘(Tenebrism)의 표현에 대한 연구에 돌입하였으며 다빈치 이전에는 인물을 신화적 관점에서 미화 시키거나 변형을 주었는데 다빈치는 인물을 마치 살아있는 사람을 그리듯이 실물 그대로 정교하게 그렸다는 ‘바시리’의 증언에 신경 썼다. 작품의 제작에 있어 다빈치가 피부의 결과 머리카락 하나도 대충하지 않았다는 것에 관심을 두고 연구하였으나 작품은 의도된 것과는 다른 결과가 나타났다. 수없이 많은 실패를 거듭하면서 묘사만이 답이 아니라 그의 방법에는 다른 점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런 저런 시도를 거듭하였다. 해부학에 대한 연구도 집중적으로 진행 했었는데 어느날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실마리의 원천은 ‘실물과 그림의 착시를 원함이 아닌가?’라는 의문에서 출발했다.

르네상스시절에는 공기원근을 표현하여 2차원의 평면 안에 3차원의 느낌을 그려 넣는 것을 중요시 했다. 그림은 크게 그려진 경우가 많고 ‘파울로 베로네제’의 그림은 10m가 넘는 경우가 많다. 또한 그림 안에는 투시원근과 공기원근을 활용하여 마치 벽면을 꽉 채운 그림이 건축물이며 그 건축물 속에는 여러 형상이 있는 것처럼 착시를 느끼게 그리는 것이 유행 했었다. 즉 그림 안에 그려진 내용이 그림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넘어선 또 다른 공간이라는 것을 착각하게 하려는 의도가 당시에 있었다고 가정하였다. 이런 생각의 끝에 다빈치가 원했던 것은 인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인물이 그림 안에 살아서 존재하게 해보겠다.’는 야심찬 의도가 숨겨져 있다고 가정하였다. 이 생각이 들면서 그가 왜 그토록 해부학에 집착했는지에 대한 퍼즐이 맞춰졌다. 당시에 해부학은 금기시되어있기에 법을 어겨가며 해부학을 한다는 것은 어떤 목적이 분명하지 않으면 할 수 없다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즉 해부학을 통해 사람을 2차원의 평면에서 살아있는 사람으로 표현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갔었다는 것으로 정리가 되면서 해부학을 어떻게 활용했을까? 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단지 우리가 미술대학에 들어가면 인체의 구조와 구성 원리를 이해하고 비율과 인체의 상태를 알기위한 해부학 수업의 과정이 아니라 그는 살아있게 하려는 목적으로 해부학을 했다는 생각을 했다. 가정은 또 다른 가정을 만들며 인체의 결과적 형상이 만들어지기 위해서 무엇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그리려는 생각이 있었다고 가정하였다.

근육이 움직이면 근육과 연결된 모든 구성요소가 움직인다. 뼈와 근막, 힘줄, 핏줄, 지방, 내피, 외피 등의 구성요소들이 순차적으로 따라 움직인다. 살아있는 인체는 움직임이 고정되어있다 하여도 몸의 균형을 잡기위해 뼈와 근육들이 눈에 보이지 않게 계속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시체와의 차이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런 생각을 고요한 방에서 촛불을 보며 실험을 했었다. 촛불을 눈으로 바라보며 느끼는 것과 사진으로 찍어서 느낌의 차이를 비교해봤다. 눈으로 볼 때는 창문을 모두 닫아 대기의 움직임이 없다하여도 불이 타오르며 미세한 불꽃의 형상 변화를 느끼게 되는데 거의 같은 상황을 사진으로 찍어서 고정 시키면 그 느낌이 나오질 않았다.

다빈치는 인체의 미세한 움직임을 통해 생동감을 얻으려했고 ‘인체의 미세한 움직임을 그렸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움직임을 표현하느냐이다. 이 또한 수없이 많은 실패와 오류로 가득 찬 세월을 보내며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을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포토샵을 하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레이어’. 그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빈치는 뼈 위에 근육과 각각의 피부들을 단계적으로 그려 들어가며 결과적으로 어떤 움직임의 형상이 되게 한다는 것으로 생각하고 레이어가 쌓여있는 피부를 그린다고 설정하고 다시 또 도전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밑에 그린 것들이 덧칠을 하면 보이지 않았기에 결과적으로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때쯤에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많았다. 다빈치의 모나리자에서 나타나는 신비함을 풀면 내가 원하는 그림의 표현을 모두 마스터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수없이 반복되는 실패로 너무나 많은 자존감의 상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벽에 부딪친 고민은 계속되고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질료에 대한 문제로 해법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에서 도예를 전공했기 때문에 재료학과 특히 유약실험을 수없이 했었던 경험이 도움이 되었다. 물감을 어떤 것을 선택해야하는가? 부터 다시 시작했다. 물감을 선정함에 있어 당시 다빈치가 사용했던 물감을 구한다면 좋겠지만 500년 전의 물감을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 당시의 물감보다 현재의 물감이 더 좋을 수밖에 없으니 그냥 현재의 재료를 연구하자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가능하면 국산 물감으로 결과를 얻어 보자는 생각을 했다. 도자기 유약을 만들 때 유약재료가 되는 돌가루를 비율에 맞춰 섞고 이것을 시편이라는 초벌 파편에 묻혀서 굽는다. 이때 얇게 바른 것과 두껍게 바른 것 그리고 온도가 높았을 때와 낮았을 때 마다 유약색의 결과가 다르게 나타나는 경험이 아주 크게 작용하였다.

유화물감과 기름들을 정해진 비율로 섞고 캔버스에 칠한 다음 그 밑 색이 마른 정도에 따라 덧칠을 하며 레이어의 형성을 실험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또 발생하였다. 문제는 물감의 농도에 따라 색상의 결과가 심각하게 다르게 나타났다. 또한 어떤 색과 어떤 색을 겹쳐서 칠할 경우도 의도 된 결과를 얻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실험과 작품 제작은 병행하였지만 뜻한 바를 얻지 못함으로 인해 작업은 즐겁지 않았다. 다 집어치고 싶은 맘이 굴뚝같았고 먹지도 못하는 술을 혼자 먹으려 고민을 하다가 물감 실험을 했던 캔버스 천에 낙서를 하며 밤을 새우고 있었다. 여러 터치들 중에 아직 마르지 않은 물감위로 그은 붓 터치와 마른 물감위의 붓 터치의 결과가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현상을 느끼게 되었다. 실마리가 또 생겼다.

물감이 마른 상태에서는 겹칠을 하면 아무리 얇게 칠해도 셀로판지가 겹쳐진 것 같은 결과가 생기는데 약간만 마른 상태에서 칠하면 물감의 일부는 천에 고정되어있고 일부는 위에 칠해진 물감과 섞이면서 고정과 유동의 중간 형태가 됐다. 밑 단계의 레이어들이 쌓여 올라오는 현상을 찾게 되었다. 이제 거의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느껴졌다.

다음날 바로 느낀 것들을 작품에 도입하며 그림을 그렸는데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타이밍에 대한 문제와 붓의 탄력에 대한 문제였다. 우연히 한, 두개의 터치에서는 좋은 결과가 있었으나 화면 전체를 동일한 타이밍에 그린다는 것이 불가능했고 원하는 건조 상태에서 겹칠을

하려면 연속해서 그려야한다는 문제가 생겼다. 또한 붓의 탄력도 물감의 상태에 따라 결과를 만드는 데에 크게 작용하였다.

먼저 연속해서 그리기위한 체력을 만들어야한다고 생각했다. 운동을 하며 체력을 보강하고 그 사이 붓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시중에서 판매하는 붓을 모두 2개씩 사다가 실험을 했다. 적합한 탄력을 얻을 수 있는 붓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당시 붓을 제조하는 회사에 상담을 하며 내가 원하는 상태와 유사한 제품을 찾았는데 그 제품은 당시 국산 무명 메이커로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제품이었지만 나에게는 최상의 제품이었다. 이 제품을 찾고 실험하는 동안 1달 정도의 시간이 지났으며 나는 밤마다 학교 근처를 달리기하며 체력을 만들었다. 2-3일은 거뜬히 밤을 새워도 될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계획한 날 삼계탕과 보신을 위한 먹거리를 든든히 먹고 작업에 들어갔다. 거의 모든 실마리가 풀려있었던 상태여서 작업은 의도와 비슷하게 되는 것 같았으나 결과적으로 목적하는 결과를 얻기는 힘들었다. 그래도 가능성은 충분히 느꼈다. 스스로를 위로하며 수많은 날들과 작품 제작이 이뤄지던 어느 날 완벽하지는 않지만 약간은 생동감이 나오는 작품이 만들어졌다.

약간의 자신감을 얻은 후 바둑 기사들이 하는 복기처럼 그 그림의 과정을 다시 기억하며 체계화 시켰다. 확신이 왔다. 그 후 며칠 뒤 그린 그림이 ‘꿈’이라는 작품이다. 이 그림은 화면의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여성의 얼굴이 보는 사람을 쳐다보는 느낌이 든다. 드디어 문제를 해결했다는 생각을 했다. 200호 크기의 작품 속 거대한 얼굴과 상반신이 감상자를 따라 움직인다. 감상자와 그림 속 인물이 서로 마주보게 되는 작품이 완성되었고 생동감이 넘쳤다. 6일간 거의 잠을 안자고 그려서 완성하였다. 그날 이후 거의 3일간 잠을 잔 것 같다. 방학기간이어서 가능했지만 엄청난 체력 손실과 잠을 못자며 생기는 죽을 것 같은 고통의 시간들이 완성되면서 눈 녹듯이 사라졌다. ‘꿈’이라는 작품은 내가 꿈꿔온 화가로써의 실력의 정점을 도달하겠다는 것을 상징하는 작품명이다. 이날 이후로 자존감도 올라가고 그림이 한결 편해졌다. 그러나 좌절은 계속 되었다. 방학 때가 아니면 그런 그림을 그릴수가 없었다. 연속해서 그려야하는데 수업가고 회의가고 사람만나고 하다보면 그렇게 되지 않았고 체력도 별도로 준비하지 않으며 졸기 일쑤여서 결과를 만들 수가 없었다. 2008년 ‘꿈’을 그리고 2015년 ‘또 다른 꿈’을 그리기까지 7년 만에 다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또 다른 꿈’의 작품은 얼굴의 표정에 신경을 썼다. 남자 모나리자를 그린다는 마음으로 얼굴의 표정이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현상을 그리기 위함이었다. 이때는 무리 없이 결과를 얻었다. 수많은 시행착오가 경험으로 있었기에 밤을 새는 것만 견뎌내면 되는 상황이었고 7년간 벼르던 작품이어서 의도와 결과가 같게 나타나는 작품을 그려냈다. 이 작품은 근접 했을 때에는 무표정이거나 근엄해 보이는데 7m 지점으로 떨어져서 보게 되면 아기처럼 웃는 느낌이 난다.

3. K-ART를 위한 여정

한류문화의 확산이 1997년 중국으로부터 시작하여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현재 방탄소년단의 기세는 대단하다는 말 외에 다른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놀라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K-GAME, K-POP, K-MOVIE 등등 한류콘텐츠는 한국을 알리는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나 또한 이런 역할을 담당하는 화가라는 소명의식을 가진지 10년이 지났다. 한류문화는 한국인이 한국적인 소재로 만든 것도 있고 한국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며 생성 된 것도 있다. 또한 대다수의 한류 게임처럼 한국적인 소재가 아니라도 하더라도 한국에서 만들어진 콘텐츠를 한류로 분류하기도 한다.

K-ART를 무엇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많은 전문가들의 많은 논의를 해야 하는 것이지만 현재 큰 방향이 없음에 대하여 의식 있고 역량 있는 화가들이 고민하고 있다.

3-1.나의 미술은 ‘KOREA Renaissance Art’

내가 하고 있는 작업의 개념을 설명하면 ‘KOREA Renaissance Art’라고 말할 수 있다.

르네상스에 대한 해석이 내가 표현하고자하는 한국문예부흥과 한국인문주의와 같다는 생각이다. 내가 표현하려는 것은 단순히 역사적 사물이나 인물을 대상으로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아름다움과 5천년동안 다듬어진 고귀한 정신과 문화에 대한 ‘재생, 부활’이다.

우리는 훌륭한 문화를 가진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근대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인해 단절되는 역사적 암흑기를 거쳤다. 이 문화암흑기는 새로운 문화가 자리 잡고 급진적으로 발전하는 데에 긍정적인 측면도 많이 작용하였다. 신분이나 계급의 문화가 완전히 해체되어 누구나 노력하면 사회적 성장이 가능한 사회가 되었다는 매우 큰 변화와 전통에 얽매여 하지 못하던 것들을 과감히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많은 변화들이 긍정적이라 볼 수 있다. 반면 좋은 전통 나쁜 전통 가리지 않고 거의 대부분의 전통들이 사라져 잘 모르게 되었다는 안타까움이 있다. 한 민족이 5천년이라는 세월을 지켜내는 데에는 아주 위대하고 훌륭한 정신문화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우리는 전통의 폐단은 없애고 전통의 훌륭함은 지켜야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미술은 한국의 훌륭한 전통과 정신을 발굴하고 지키며 발전시키려는 노력이다. 그 표현이 아름다울 수 있도록 그동안 수많은 노력을 통해 기량을 닦았다. 이런 나의 사고와 미술적 표현을 ‘KOREA Renaissance Art’라고 말할 수 있다.

3-2.‘KOREA Renaissance Art’의 표현

나는 서양화로 입문한 화가이다.

‘KOREA Renaissance Art’를 생각하면서 역사적 인물이나 전통을 중심 소재로 선택하고 그 전통성 위에 현재 대중의 감성과 공감대를 접목하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처럼 서양 미술의 전통성과 정통성을 가진 서양의 고전주의 화가들의 방법이나 기법에서부터 출발하였다. 현재는 나의 방식으로 작업에 임하고 있으나 전통에서 출발한 방법들이 대중들에게 친밀감을 더 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화가는 끊임없는 자기 혁신을 이뤄내는 사람이다. 분명 앞으로의 상태는 현재와 다름으로 나타나겠지만 방향은 분명하다.

그토록 꿈꾸어 왔던 ‘KOREA Renaissance Art’를 하기로 결심을 하고 2016년부터는 한국적인 소재와 내용을 연구 중이다. 위대한 대한민국 시리즈와 희망의 문, 한국인 시리즈는 한국적 소재와 한국인을 대상으로 작업하는 것이다. 한국인으로 태어나 한국적인 정서로 세계가 인정하는 그림을 그리고 세계인이 함께 감동하는 작품을 만들고 싶은 오랜 꿈을 꾸는 작업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KOREA Renaissance Art’를 생각하며 장소를 선정함에 있어서도 많은 생각을 했었다. 세종문화회관이라는 장소는 대한민국의 얼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상과 이순신장군상이 지켜보는 광화문 광장, 국민 소통문화의 장이 주는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세종문화회관은 국민 누구나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 공간의 기능처럼 자유로운 문화의 소통이 이루어져 한국의 훌륭한 문화를 통해 문화 국민의 자긍심이 고취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Featured Posts
Recent Posts
Archive
Search By Tags

Kai Jun e-mail  : na2na3@hanmail.net

  • Facebook Clean
  • White Instagram Ic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