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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추모를 위한 진혼곡


‘오늘도 성실히’ 작품 설명 – 전완식

나는 특이하게도 기저귀를 차고 다니던 3살 때부터의 기억이 있다. 그러나 나의 기억 속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영정 사진 속에 계신 얼굴만 알고 있을 뿐이다. 한 번도 뵌 적은 없지만 아주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삼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속에는 아버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준 잔인한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생생하게 담겨있다.

어린 시절에는 우리 조상들이 겪은 전쟁의 참상이 제삿날이나 식구들이 모이는 날마다 듣던 옛날이야기로만 여겨졌으나, 대학에 다닐 무렵부터 그 수많은 아픔의 이야기가 아버지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라는 자각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제 그런 생각을 시작한 지 3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반전과 평화의 그림을 그리거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탐구하던 시간도 있었지만, 최근 몇 년간 무언가 나의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메시지를 표현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작년부터 이를 어떠한 메시지로 전달해야 할지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나의 내면에서 울리는 소리를 표현하고 싶었지만, 그 울림의 정체를 확인하기란 쉽지 않았다. 수많은 밤을 고민하고 책과 씨름을 하고 이런저런 그림을 그려보기도 했지만, 나의 내면이 말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고민의 시간을 보내다가 2014년 11월 4일 아침에 눈을 뜨면서 어떤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그동안 답답하게 드리워져 있던 장막이 걷히고 ‘아픔’과 ‘인간 본성’이라는 두 화두가 떠올랐다.

인간의 사고와 행동은 생득적인 본성에 따라 좌우될 때도 있지만, 윤리와 교육으로 교정되기도 한다. 예로부터 동서양의 여러 철학자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탐구했다. 맹자는 동물과 구분되는 도덕적 능력을 인간의 본성이라 규정한 ‘성선설’을 통하여 철학적 반성과 너그러움의 정치를 이상향으로 삼았다. 순자의 ‘성악설’은 혼란한 사회상 때문에 등장했으며, 인간은 수양을 통해 도덕적 완성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그 요지다. 인간의 본성은 본능과 구분되는 요소다. 인간에게는 동물과는 다른 ‘적응성’이 있다. 인간은 사회와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변모한다. 순자는 이 과정에서 탐욕의 본능적 요소보다 ‘반성’의 능력을 발전시켜 합리적 행위와 사회적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순자의 시대로부터 23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인류는 폭력이라는 본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20세기로만 눈을 돌려 보아도 난징 대학살 사건, 아르메니아 학살, 스탈린 강제수용소에서의 학살,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등 무수한 잔혹행위가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홀로코스트’라 불리는 학살까지 더해진다. 1945년 1월 27일 폴란드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포로수용소가 해방될 때까지 600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이 인종청소라는 명목 아래 나치에 의해 학살되었는데, 인간의 폭력성, 잔인성, 배타성, 광기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20세기 인류 최대의 치욕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직후 독일의 권력체계는 나치당과 국가의 비밀경찰기구는 RSHA(국가보안본부) 아래 일원화되었다. 게슈타포는 그 제4국(局)으로서 국내는 물론 점령지에까지도 탄압의 손길을 뻗쳤으며, 아돌프 아이히만의 유대인과(課)는 이 게슈타포의 하부기관으로서, 유럽 전역에 있는 유대인들을 폴란드에 있는 강제수용소에 집결시켜 이들을 몰살시키는 임무(Final solution)를 수행하였다.

아이히만은 독일의 항복 후 가족과 함께 아르헨티나로 도망하여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가짜 이름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의 자동차 공장 기계공으로 은신하고 있다가 1960년 5월 이스라엘의 비밀정보부인 모사드에 의해 체포당하여 이스라엘로 압송되었다. 그는 1961년 12월 예루살렘의 법정에서 나치 독일이 저지른 유대인 600만 명의 학살 책임을 추궁당한 끝에 사형판결을 받고 1962년 6월 1일 처형되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 재판과정을 참관하였다. 재판이 시작되기 전, 나치의 전체주의를 경험한 유대인으로서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으로부터 ‘극단적인 악’의 근원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아이히만의 진술과 태도는 그녀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상상했던 아이히만은 악마라 불려 마땅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자연인으로서의 아이히만은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평범했으며, 가정에 충실했다. 이런 관찰을 바탕으로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이론을 도출했다. 타인의 입장에서 사고할 줄 모르는 ‘판단능력의 부재’가 아이히만을 잔혹한 범죄자로 만들었다는 주장이 그 요지다.

한나 아렌트는 생각하지 않는 인간이 저지르는 악행을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말로 설명했다. 그녀는 “생각하는 일은 정치적 자유가 보장된 곳에서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저명한 학자들이 으레 말하는 것과는 달리 생각하도록 하는 힘은 인간의 다른 능력에 비해 매우 약하다. 폭정 아래에서는, 생각하는 일보다 행동하는 일이 훨씬 쉽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우리가 겪었던 많은 전쟁과 아픔은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성실한 사람들에 의해 맹렬하게 확산되었으며, 그 피해는 결국 그들 자신에게도 돌아갔다는 사실을 역사가 입증한다.

홀로코스트는 ‘타인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능력’의 부재로 인해 평범한 사람들이 저지른 인류 최대의 치욕적인 사건이 되었다. 무수한 희생자를 관리하고 그 과정을 기록할 사람들, 추상적인 구상에 맞춰 실질적인 절차를 계획할 사람들과 실무를 수행할 사람들이 없었다면 이런 잔학행위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앞으로도 이와 같은 사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특히 한국인들은 2차 세계대전과 6.25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며 다시는 극단적인 악이 우리를 지배하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

나는 ‘평범한 악인들’이 구축했던 극단적인 악의 세계가 피해자는 물론 가해자들에게까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아픔의 기억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상징적 요소가 필요했기 때문에 모든 사물과 희생자들에게 남겨진 아픔의 상징을 천을 감아 붕대로 표현하였다. 아픔 자체를 나타내면서 상처를 감싸주고, 치유를 생각하게 하는 붕대는 우리가 잊지 말고 때로는 보듬어야 할 것들에 대한 상징이다. 정제된 색채에서 나타나는 무거운 분위기와 설치된 벽면을 가득 메운 여인과 아이들의 이미지는 희생자를 대변한다. 공간에 부유하는 듯한 그들의 얼굴 형상은 반전의 표상적 의미이자 극단적인 악의 출현을 경계하는 응시자의 이미지다. 골동품을 활용한 소품들은 과거의 현장을 고발하는 동시에 현재까지의 지속적인 역사 속에서 인간 본성의 욕구를 담아내는 오브제로 삼았다.

우리는 과거의 아픔을 잊지 말고 경계의 시선으로 미래를 지켜보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 희생과 상처의 잔해가 사라지고 우리 아버지와 같은 피해자들의 가슴속에 남아있는 아픔의 기억이 치유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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